낙동정맥(完)

낙동정맥 10차, 11차(일부) 답운재~통고산~한티재 18.12.21

byun4do 2018. 12. 26. 12:20

낙동정맥의 미진행구간 중 답운재에서 한티재까지 구간을 갔습니다.

포항쪽 구간을 먼저 가려다 아무래도 눈이 적을때 울진쪽을 하는 것이

후에 더 편안히 마무리 할 수 있을듯 하여...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움직이려니 아무래도 저녁에 도착해

바로 산행을 진행해 새벽녘에 끝나는 밤산행으로 계획을 짰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눈은 적었고 날씨도 좋아 산행이 편안했습니다만

문제는 해드렌턴이 ~~~ㅠㅠ

새것이라 밧데리가 짱짱한줄 알았는데 초반부터 흐리흐리...ㅠ

내내 산행을 진행 못하면 새벽까지 기다려 아침부터 해야지 했는데

그래도 다행이 마무리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중반 산행의 오르내림에 좀 고생했고 돌아 오는 대중교통이 잘 맞지않아

시간을 많이 소비했네요.

그래도 이젠 한 구간만 땜방을 하면 낙동정맥도 모두 끝이 납니다.

한남,금북정맥이 약 4번 남았으니 9정맥의 끝도 살짝 보이네요.

 

진행사항: 답운재(18:05)~임도(18:55)~울진전파강수관측소(19:52)~통고산(19:56)~임도(20:20)~

937.7봉(20:33)~애미랑재(21:46)~칠보산(22:02)~새신고개(23:41)~10지춘향목(00:30)~깃재(00:52)~

885.5봉(01:51)~헬기장(03:59~612.1봉(04:17)~길등재(04:29)~한티재(05:24)~수비면(05:40)

 

 

평상시엔 트렝글이 늘 거리가 적게 나왔는데 이번엔 산경표가 훨씬 적게 나왔네요...

선답자의 경우 보통 33km대임을 보면 산경표가 오류인듯...

 

 

 

 

 

 

 

 

 

울진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가려는 곳은 금강송면으로 운행하는 광비버스입니다.

예전엔 서면이었는데 2015년 금강송면으로 변경했다고 하네요.

하루 세번 운행하는데 07:00시, 12:00시, 17:20분 요렇게 세번 운행합니다.

버스를 타는 곳도 터미널에서 길을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승차하는데 시간이 좀 남아 이른 저녁을 먹으러 식당을 갑니다.

 

편의점 바로 옆에 있는데 가격대비 괘안하지만 제가 도착한 때는 좀 일러 반찬이 조금 적었네요.

 

버스정류장 의자인데 앉으니 따뜻한게 전기로 데워주네요...ㅋㅋ

 

답운재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고,

 

기사님이 오래 운전을 하신듯 막힘없이 코너를 돌아가는데~~~쓩~~~~ㅋㅋ

 

고맙게도 고개 아래의 답운리정류장이 아니고 고개 정상의 답운재에서 잠시 정차 내려주시네요.

덕분에 고갯길을 걸어 올라오는 시간과 고생을 면했습니다.

그리고는 또 쓍~~~ㅋㅋ

 

보름달이 훤 합니다.

이때만해도 보름달이라도 별 무신경이었는데,

 

통고산쪽 안내판.

이런것 까지 적어 놓은걸 보면 혹 입구에서 입장료라도 받나 아님 홍보용인가요?

 

들머리 답운재(踏雲峙/36번국도/619.8m)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쌍전리와 광회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안개가 늘 끼어 있어서 마치 구름을 밟고 넘는 듯한 고개라고 하여 답운치라 불렀다 전한다.

동서로 36번 국도가 관통, 동쪽은 통고산 자연휴양림을 접하고, 서쪽은 옥방천(玉房川)을 사이에 두고 봉화군과 접경을 이룬다.

 

오늘은 어차피 홀로 밤새 산행을 해야하니 준비를 끝내곤 바로 산행을 시작합니다.

 

후사면엔 그래도 눈이 좀 남아있습니다만 산행에 불편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산불감시초소

 

폐헬기장인듯,

 

임도에 당도하고

 

 

 

두번째 임도에 당도하고,

 

 

휴양림갈림길 안내판

 

 

 

울진 전파강수관측소

 

 

헬기장을 지나고,

 

통고산(1,067m) 정상 안내석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쌍전리·광회리·왕피리에 걸쳐 있는 산.
전설에 의하면 고대국가 형성기 실직국의 안일왕이 다른 부족에게 쫓기어 이 산을 넘을 때 하도 재가 높아 통곡하였다 하여

통곡산(通谷山)으로 부르다가 그 뒤 통고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동쪽으로는 불영계곡과 왕피천의 주요 수맥이 되며,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상류천에 해당한다.

불영계곡에는 통고산자연휴양림이 있는데, 통고산자연휴양림은 태백산맥 줄기의 깊은 곳에 있어 숲이 울창하다.

통고산자연휴양림은 불영계곡의 상류에 자리하여 입구에서 정상까지 10㎞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흐르는 불영계곡을 볼 수 있다.

불영계곡 바닥과 양쪽 절벽에 화강암이 풍화되어 절경을 이루며, 계곡물이 쏟아지면서 이루어진 크고 작은 폭포가 여러 개 있다.

특히, 10월 중순이면 아름다운 단풍이 장관을 이루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옆면엔 안내글도...

 

 

산불감시초소겸 강수관측소

 

왕피리방향으로,

 

여기는 좀 더 눈이 있는데 등로에만...

 

다시 임도를 만나고,

 

115-84 안내판 뒤로,

 

937.7m봉 정상 삼각점과 안내판

 

937.7봉 안내판

 

잡목이 많습니다만 그래도 혼자 걸으니 조금 속도는 나는데요.

 

쓰러진 잡목도...

 

뭔 불빛인지 산행 초부터 산행이 끝날때까지...

근체에는 일월산에 중계소가 있다는데 그 불빛인지...

 

 

급경사로를 내려서고,

 

개울물이 맑게 흐르고,

물병을 꺼내기도 귀찮아 개울물에 목을 축입니다..ㅋ

정말 시원하네요.

 

애미랑재

 

바로 앞으로 띠지가 있는데 직진은 힘들어 보여 다시 우측으로 올라가 보고,

 

애미랑재(광비령, 팡비령) 안내판

 창해삼국(滄海三國)은 지금으로 부터 약 2,000여년 전 동해안에 있었던 예국(濊國, 강릉), 실직국(悉直國, 삼척),

파조국(또는 파단국)(波朝國, 波但國, 울진)을 통칭하여 부르는데,

기원후 50년 무렵 실직국이 파조국을 침공하여 합병한 뒤 10년 후 예국으로 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데

당시 실직국의 안일왕이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합니다. (안일왕산성,울진국 서면 소광리 소재)
이 산성의 남쪽으로는 통고산, 북쪽은 삿갓봉, 동쪽으로는 울진시, 동해바다가 조망됩니다.

어릴적 아이들이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나온다 그쳐라" "예쳐온다 그쳐라" 라고 달랬다고 하는데

이 뜻은 강릉지역의 예국이 쳐들어 오니 울음을 그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애밀랑재(=애미랑재)가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궁금해서 좀 살펴보니,

 

가. 실직국(1)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곳 동해안에는 강릉지역의 예국(濊國),

삼척지역의 실직국(悉直國), 울진지역의 파조국(波朝國) 또는 파단국(波但國)이란

군장 국가가 공존해 있었는데, 이들 세 나라를 통칭하여 창해삼국(滄海三國)이라 한다.

창해삼국은 신라 백제 고구려와 같은 국가의 기틀을 갖춘 나라가 아니고,

소집단이 모여 한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무리 사회적 군장국가로서

당시 한반도 내에는 그러한 군장국가가 130여 개나 있었다.


철기시대를 맞아 다량의 청동제 및 철제무기를 소유한 이들 세 나라는 영역확장을 위한 전쟁을 하게 되고,

기원 후 50년경이 되면 마침내 삼척의 실직국이 울진의 파조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실직국은 강릉의 예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당시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은 울진으로 피난하여 산성을 쌓고 방비를 하였다.

이 산성은 안일왕이 피난 와서 축조한 성(城)이라 하여 안일왕 산성이라 부르는데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가면 지금도 정상부에 산성의 형태가 잘 남아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의 하천변에 자연석 바위로서 안일왕 산성을 알려주는 황장금표(黃腸禁表)를 지나 산성의 정상에 오르면

 남쪽은 울진에서 제일 높은 통고산, 북쪽은 삿갓봉, 동쪽은 동해바다와 울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데,

이러한 지형지세로 볼 때 이 산성은 동쪽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 판단되며,

당시 창해삼국의 전투가 바닷길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강릉의 예국이나 삼척의 실직국, 울진의 파조국 모두 강문항, 삼척항(정라진),

죽변항 등의 포구를 전투 기지화 했으며 그곳이 주된 침투경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실직국의 왕(王) 가운데 유일하게 그 이름이 남아있는 “안일왕”. 울진지역에서는 “안일왕” 보다 “에밀왕”으로 불려지는데,

그곳의 70대∼80대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답니다.

즉 예국이, 강릉의 예국이 쳐들어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말이었다.

이와 함께 안일왕 산성 주변의 통고산은 안일왕이 이 산을 넘으면서 하도 재가 높아 통곡했다 하여 통고산,

삿갓봉의 복두괘현(僕頭掛縣.일명 박달재라고도 함)은 안일왕산성이 함락되자 안일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다가

이곳에서 복두 즉 임금이 쓰던 모자를 벗어놓고 샘물을 마시던 중 적군의 추적이 가까워지자

 미처 걸어놓은 복두를 쓰지 못하고 도망간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울진군 서면 왕피리(王避里)라는 마을은 임금이 피신했던곳, 병위동(또는 병우동)은 안일왕의 군사가 머물렀던 곳,

포전(飽田)은 왕이 피난 당시 군속과 같이 갈증을 풀고 포식한 곳, 임광터(또는 임왕기)는 임금이 앉아 쉬던 곳, 핏골은 왕이 적에게 붙잡힌 곳,

거리곡은 실직국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지명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울진지역에는 2천여 년 전 영동남부지역의 중심세력이었던 실직국의 역사가 아직도 그 숨결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실직국의 중심지였던 삼척보다 울진지역에 실직국 관련 설화가 잘 남아있는 것은 울진 지역의 지형적 고립성 때문으로 해석된다.

 삼척지역의 실직국시대 유적으로는 원덕읍 노경리 및 근덕면 맹방해수욕장의 초기 철기시대 유적과

북평항만 확장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집터 및 돌 톱 구슬 토기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그동안 관동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 3월 29일 삼척시립박물관이 개관되면서

현재 시립박물관 제1전시실(선사·역사실)에 전시되어 있다.


나. 실직국(2)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실직국이 한국 역사의 무대에 실명(實名)으로 등장한 것은 서기 102년부터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파사이사금 23년 조(條)의 내용이 그것이다.

102년 8월 실직국은 경북 경주 인근의 군장국가인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의 경북 안강)과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인다.

오늘날 경북의 울진, 영해, 영덕을 지나 경주의 관문인 청하면 지역까지 쳐 내려 가서

그 지역의 음집벌국과 전쟁을 치룰 만큼 실직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던 것 같다.


실직국과 음집벌국은 전쟁을 하다가 당시 남쪽지역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한 신라의 왕을 찾아가 판결을 요청한다.

이에 신라왕은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금관국의 수로왕을 초청하여 판결을 내리게 했는데

수로왕은 문제의 그 땅을 음집벌국의 것이라고 판결을 내란다.

신라왕은 재판관으로 초청했던 수로왕을 위해 6부(部)에 명하여 잔치를 벌이도록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수로왕을 위한 잔치” - 이것이 실직국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왕의 명령을 받은 신라의 6부-급량(박씨),사량(김씨), 본피(정씨), 모량점량부. 손씨),한지(잠탁부. 배씨), 습비(석씨. 안강지역)-에서는

수로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게 되는데, 6부 중 5부에서는 이찬이라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수로왕을 접대했지만

오직 한지부(漢祗部,또는 한기부漢岐部)만이 벼슬이 낮은 자가 접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로왕은 화가 나서 부하에게 명하여 한지부의 족장격인 보제를 죽이고 금관국으로 귀국하였으며,

 한지부의 족장 보제를 죽인 수로왕의 부하 탐하리는 음집벌국으로 도망가 숨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왕은 크게 노하여 살인범 탐하리를 찾아내려 하는데

음집벌국의 왕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군사를 내어 음집벌국으로 쳐들어간다.

이에 음집벌국의 왕은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고, 이 때 실직국과 경북 경산지역의 압독국도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04년 가을 실직국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와 접전을 벌이지만 다시 패하게 되고,

신라는 실직국의 핵심인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실직국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당시 실직국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정기적으로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상호 병존적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래서 138년부터는 신라의 왕이 실직국의 영역인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지낼 만큼 실직국은 신라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이 되면 실직국은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480년 경 마침내 자치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실직국은 480년부터 500년까지 약 20여 년 간 고구려의 직접 통치를 받는다.

481년 영해까지 장악한 고구려는 점령국을 자국의 군현(郡縣)으로 복속시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는데

실직국 역시 고구려 군현의 하나인 실직군(悉直郡)으로 개편되어 고구려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당시 실직국의 영역은 실직군 밑에 죽현(죽령)현, 만경(만향)현, 해리(파리)현, 우곡(우계)현, 우진야현이란 5개의 현을 두었다는

고구려의 군현제 기록으로 보아 북으로는 우곡현(羽谷縣.羽谿縣;옥계), 서로는 죽현현(竹峴縣.竹嶺顯;하장),

 남으로는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원덕)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

우시군(于尸郡;영해) 아혜현(阿兮縣;청하) 야시홀군(也尸忽郡;영덕)지역까지가 실직국의 영역으로 파악된다.

이로써 동해안지역을 대표했던 군장국가 실직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이 3국의 열강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국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다. 실직주의 군주 - 김이사부

신라에서 주(州) 군(郡) 현(縣)제도를 실시한 것은 제22대 지증왕 6년(505년) 2월인데

 이 때 동해안에는 유일하게 실직국(삼척)에 실직주를 설치했다.

이 실직주에 첫 군주로 부임한 인물이 이사부(異斯夫)였으며, 신라시대 군주(軍主)라는 이름은 이 때 처음 생긴 것이다.

군주는 지방행정의 수장일 뿐 아니라 군사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는 지위였다.

실직주의 군주로 부임한 이사부의 성은 김씨이며,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4대 손(孫)으로 이름은 태종(苔宗)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흔히 이사부로 알려져 있다.

 이사부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 정립시대로 가던 때,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에 걸쳐 정치. 군사. 학문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우산국과 대가야 정벌을 완수했고, 진흥왕 때에는 병부령으로서 중앙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왕에게 아뢰어 국사(國史)를 편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사부의 많은 활약 가운데서도 우리 삼척과 연관된 것은 우산국(于山國) 정벌이다.

이사부가 실직주의 군주로 부임할 당시 울릉도는 우산국이라는 부족국가였으며, “우혜”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우혜왕은 대마도에서 “풍”이라는 미녀를 데리고 와 왕후로 봉한 다음부터 정사는 돌보지 않고 풍미녀와 사랑 놀음에 빠졌다.

게다가 왕후의 사치를 위해 삼척의 해안마을은 물론이고, 멀리 신라의 인근까지 노략질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이에 신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마침내 신라왕은 실직주의 군주 이사부에게 우산국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511년 이사부는 즉시 출병하여 우산국에 접근했지만 천연요새와 같은 지형과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벌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되돌아온 이사부는 군사를 철저히 훈련시키고, 이듬해인 512년 실직주를 그대로 존속시킨 상태에서 영역을 확장하여

 강릉의 하슬라주 군주에 오른 후 다시 우산국 토벌길에 오른다.

 삼척의 정라항에서 우산국에 다다른 이사부는 우혜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하도록 권한다.

그러나 우혜왕은 지난번 싸움에서 후퇴한 신라군인지라 얕보고 그 자리에서 사신의 목을 벤 후 전투를 시작한다.

 이사부는 계획했던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어 간다.


모든 군선의 뱃머리에 만들어 세운 대형 나무(木)사자로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 하고 또 화살도 쏘게 하며 군선을 몰게 했던 것이다.

 이 광경에 우산국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커다란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고 있으니...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이 때 신라의 군사들이 합창하여 큰 소리로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서 섬사람들을 몰살 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미 이상한 짐승에게 질려버린 우산국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데다가 신라군이 쏘아대는 빗발치는 화살을 피하기 바빴으므로

우혜왕은 자신의 투구를 벗어 이사부의 군문(軍門)에 던지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우산국은 멸망하고 이 때 부터 실직주의 관할영지가 된 것이다.


512년. 이렇게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역사의 자취가 남아있으니 울릉군 서면 남양포구의 사자바위와 투구바위가 그것이다.

신라군이 군선(軍船)에 싣고 왔던 나무사자가 울릉도에 내려져 바위로 변했다는 사자바위,

우혜왕이 항복할 때 벗어던진 투구가 남아 투구봉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아직도 울릉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척시에도 우산국 정벌의 기념물이 있다. 사직동과 근덕면의 경계(옛 삼척시.군의 경계)인 한재 길 옆에 세워진 사자상과

 동해시와 경계인 등봉리 주유소 길 옆의 사자상(獅子像)으로 1986년 박환주 시장 재임시 향토사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산국 정벌 때 활용했던 나무사자를 기념하는 뜻에서 삼척시 경계지역에 돌 사자상을 설치해 둔 것이다.

우산국 정벌,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시켰기에

울릉도와 독도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토로 확실하게 자리 매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 실직국의 부흥운동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 동해남부 고속도로를 타고 울진 쪽으로 향하다가 보면 죽변 외곽도로인 간이 비행장이 나오는데,

그 비행장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편에 봉평신라비와 비각이 있다.

이 봉평신라비에서 “실직국의 부흥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한 면을 찾을 수 있다.

봉평 신라비는 1988년 3월 발견되어 4월 15일자 대구 매일신문 보도로 전국에 알려졌으며,

문화재관리국(청)과 대구대학교 연구팀의 조사 결과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진흥왕순수비보다 훨씬 이른 법흥왕 11년(524년)에 제작 건립된 봉평 신라비는 1988년 11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는데,

 비석의 재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매우 불량한 편이며, 전체적으로 4각을 이루고 있으나

글씨가 새겨진 1면만 약간의 다듬질을 했고 다른 3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2미터 높이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총 10행 399자이며, 서체는 예서에서 해서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글씨체로서

치졸한 편이고, 비문의 내용은 크게 4문단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신라인 13명이 갑진년 정월 15일에 종묘에서 조상신으로부터 게시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둘째 문단은 법흥왕 이하 13명의 일행이 거벌모라 남미지에 순행하여 벌교령(오늘날의 비상계엄령)을 내린 것으로,

셋째 문단은 신라 6부(部)가 상의하여 정한 바에 따라 집행관인 대인에 의해 지방관 및 토호에게 형을 집행한 내용이며,

넷째 문단은 총지휘 감독한 실지군주와 석각한 사람 등의 인적사항으로 파악된다.

이 비문에 의하면 505년부터 신라의 직접 지배를 받던 실직국 백성들은 524년 거벌모라성을 불태우는 등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신라 측에서 보면 반란이지만 실직국으로서는 국권회복운동 또는 부흥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맙니다.

신라의 법흥왕이 친히 출병하여 난을 평정하고 지방관인 실지군주와 그 아래 실지도사와 거벌모라 도사에게 장형의 벌을 내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그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비석을 세워둔다.

비문을 보면 거벌모라의 남미지라는 노인촌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는데, 거벌모라는 당시 울진지역의 수부였던 봉평의 지명이고,

 노인촌(奴人村)이란 신라에 정복당한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칭하며 이들은 다른 지역주민들보다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으리라 보며,

거벌모라도사는 실지도사와 함께 삼척의 실지군주의 지휘 아래 있었으므로 이것은 곧 신라에 정복당했던 실직국 사람들의 부흥운동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 비문을 통해 “실직”은 법흥왕 대에 “실지”라는 지명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시의 지방행정제도가

 오늘날 도지사격에 해당하는 군주 아래, 시장 군수급의 도사가 지역을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실지주의 경우 군주 아래 삼척의 실지도사와 울진의 거벌모라도사로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실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은 당시 거벌모라의 호족이었던 진(秦)씨 일족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일본 경도지방의 전역에 먼저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계 주민들을 장악하고

그 지방의 가장 힘있는 호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광륭사라는 절을 하타 가와가츠가 세웠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들의 힘을 짐작하게 합니다.

 진(秦)은 일본어로 하타, 울진의 옛 이름 파단(波但) 또한 일본어로 하타이다.

한 지역의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 때 고향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예는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지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일본의 나라현 교토후 인근의 우즈마사촌(太秦村)에는 진씨(하타)의 종가가 살고 있으며, 진씨의 호수는 7,100여 호가 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1988년 7월 교토대 명예교수인 우에다 마사하끼박사가 일본학자로는 최초로 봉평 신라비를 연구하기 위해 울진을 방문했고,

1989년에는 하타씨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일본 나가오카교오市 요오쿠사(寺)의 주지 구사카 다이코씨가 울진을 방문했으며,

 1990년 봄에는 일본 영화감독 일행 5명이 봉평 신라비와 마을 전경, 봉평 해안과 북면 상당리의 진씨가(家)를 찾아

가대(家垈;집터)를 촬영해 갔다. 모두가 자기들의 뿌리를 찾기 위함이다.

 이들 모두 울진의 봉평 신라비에 새겨진 “파단(波但)”이라는 글자를 보고 하타(秦)씨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라고 확신했다.

일본의 사료에 진씨와 한씨, 하타우찌와 아야우찌 이 2대 씨족의 시조는 모두 응신왕 대인 4세기 후반에 귀화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실직국 부흥운동의 주도세력이었다고 추정되는 진씨 일족의 일본 망명설은 향토사 연구의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삼척 천은사님의 블러그에서,


 

우측 위에도 철조망에 띠지가 있는데 등로는 보이지 않고,

 

다시 아래로 내려와서 더 아래로 내려가 살펴볼까 하다가 렌턴도 그렇고 그냥

축대를 올라갑니다만 힘겹게 오르고 보니 우측으로 등로가 있는게

애미랑재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서면 등로가 있을 것 같네요.

 

 

칠보산 정상 삼각점 및 안내판.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 있는 산으로,

칠보라 함은 인재등과의 보, 충절의 보, 백자천손의 보, 교역의 보, 어족의 보, 육축의 보, 온화의 보를 뜻한다.

 태백준령이 뻗어 내려 이루어진 산으로 매가 보배를 안고 하늘을 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동해의 일출을 맞는 매방울 동산이다.
칠보산은 해안산맥이 지나는 능선이 펼쳐 있어 동해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이 실로 그윽하다.

동쪽으로는 동해 바다와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부구리, 남쪽으로는 덕천리, 북쪽으로는 한수원이 위치하고 있다.
칠보산흥부장터로 영동 지방의 유명한 교역의 중심지였고 십이령 행로의 출발지였다.

 또한, 을사늑약 이후 관동 의병의 전적지이며, 3·1운동 때는 독립만세를 부르던 곳이다.

현재는 울진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 있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옆으로 국도 7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암튼 땀 좀 빼고 올라섭니다.

 

새신고개 안내판

마을 어구에 있는 약물탕과 이 약물탕을 중심으로 하여 숲이 우거지고 산새가 많이 깃들어 살기 때문에

손사현(孫士鉉) 선생이 마을에 들어 오면서 그리 불렀다고 한다(곽충섭(72) 제보).
땅 이름 중에는 새가 들어 가는 것이 아주 많다.

조성리(鳥成里)도 새 신을 한자로 뒤친 꼴인데 새롭게 개척한 마을이거나 아니면 마을과 마을의 사이를 가리키는 곳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중간에 덕산지맥 분기점이 있는데 보질 못하고 내려왔네요.

덕산지맥(德山枝脈)
백두대간 매봉산에서 부산 몰운대 바닷가로 벋어 내리는 낙동정맥이 칠보산에서 2.2km 내려 온 무명봉 직전에서 가지를 쳐

일월산 (1,217.6m) ,덕산봉 (680m), 장갈령(575m)을 거처 안동시 용상동 법흥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73.1k m의 산줄기이다.

안동호 상류 낙동강 동쪽, 임하호상류 반변천 서쪽 분수령을 덕산지맥(德山枝脈)이라 한다.

 

10지 춘양목.

 

이건...ㅋ

 

 

 

10지 춘양목.

밝을때 보지 못해 좀 아쉽네요.

 

깃재 안내판

수비면 계동에서 넘어 오는 높은 고개가 있어 길이 험하고 걷기가 어려워서 기어 다닐 정도로 험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목의 부러진 모습이 흡사 날개와 같아요.

 

 

 

884.7m봉 정상 안내판

 

885.5m봉 정상 안내판

 

잡목이 제대로 등로를 막고 있네요.

 

자유인 산악회 띠지도 방갑네요.

 

비닐로된 얇은 줄이 산행중에 있기에 뭔가 했더니 입산금지 안내판을 고정했던 거네요.

 

폐헬기장

 

 

612.1m봉 정상 안내판

 

달님이 참 밝습니다.

희미한 렌턴불때문에 오늘 제대로 신세를 지고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달님이 없었다면 찬바람 맞으며 기다려 새벽에 다시 산행을 시작했어야 했을 겁니다.

 

길등재 안내판

 

등로는 반사경뒤로 고고~~

 

 

산을따라 뭔 불빛이 보인는데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가로등? 같은데 암튼 분위기는 죽입니다...ㅋ

 

 

산행 내내 보이던 가로등이 하산 직전까지도 보이네요.

 

조림을 한 벌목지대를 지나고,

 

울창한 숲길에선 이렇게 발등이 겨우 불에 보일 정도입니다...ㅋㅋ

달님이 다시한번 감사하지요.

 

한티재가 가까워지니 띠지가 많습니다.

 

수비면 관광 안내판

 

한티재 안내판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과 우리의 의병들이 치열한 싸움을 하던 곳이다.

 지금도 비가 오면 핏빛 같은 녹물이 바위에서 스며 나오고 있다고 하며 통로의 반석에는 많은 말발굽 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한티재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한티재가 태백산맥의 열두고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권숙이(63) 제보).
한티란 우리말을 한자로 뒤쳐서 대현(大峴)으로 한 것인데 한티를 한치로 부르는 고장도 있다.

 이는 구개음화에 따른 것으로서 한티의 한은 크다 · 높다 · 좋다의 뜻으로 기본형은 ‘하다’이다

 

이렇게 산행이 무사히 끝이 났습니다만 알아본 바엔 첫 버스가 수비면에서 7시 20분에 있는데 한참을 추위에 떨어야 겠네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비면으로 내려서서 마을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산에서 보니 마을에 불빛이 계속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기에 뭔가 했더니

가로등 옆에 별모양의 등이 또 있어서 이게 계속 반복해서 켜지고 꺼지고...ㅋ

 

수비면 안내판

 

낙동정맥 트레일 안내판도 있네요.

 

수비면 발리리 마을 안내판

이곳 마을이 발리리인가 봅니다.

 

다행이도 파출소에 불이 켜져있기에 좋아라 했더만 사람은 없고 불만...ㅠㅠㅠ

추워 벨을 눌를까 했다가 잠시 더 돌아보기로 합니다.

 

선미식당

조금 안쪽으로 내려서니 가계에 불이 켜져있네요.

들어가 물어보니 들어 오랍니다...ㅋㅋ

 

인근에 벌목을 하는 인부가 많은가 봅니다.

때문에 이른 아침에 가계를 열었다고해 식사와 소주 한병으로 언 몸을 녹이고

버스 시간에 맞춰 따뜻하게 휴식을 취합니다.

 

 

식당 바로 옆 버스 정류소

영양버스터미널은 길을 건너 정류소를 바라보고 있네요.

그런데 이 근방에 식당이 7개간 암튼 조그만 마을에 엄청 많습니다..

 

따로 안내판도 없이 운행을 합니다.

참 현금만 가능하고 카드는 안됩니다.

참고로 운행시간은,

07:25, 08:30, 09:30, 11:25, 13:35, 14:05, 17:50, 19:05분 임다.

 

무사히 마치고 돌아 오는 즐거운 마음에 한장...ㅋ

 

수비면에서 나오는 길엔 암릉이 많아 보기에 참 멋지네요.

 

 

영양 버스 터미널(054~683~2213)

 

영양군 관광 안내판

 

이곳에서 동서울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온 것인데 시간이 7:00시 입니다.

수비면에서 출발하는 버스 첫 시간이 7:20분인데 어떻게 타라는 것인지...ㅋㅋ

사실 시골엔 이처럼 버스가 있다고는 해도 연계해서 타기에 불가능한 노선과 시간이 많습니다.

이래서 혼자 대중교통으로 다니기에 힘이 들어 야간산행도 불사하는 것이죠.

대중교통에 맞추기 위해서...

 

 

암튼 안동엔 서울로 가는 버스가 많다기에 다시 안동터미널로 이동을 합니다.

 

안동터미널 버스 시간표

이곳엔 그래도 버스가 많습니다만 이미 자리가 다 차 탈 수가 없네요...ㅠㅠ

하는 수 없이 동서울로 가 다시 전철로 이동하려 서울로 갑니다.

 

이곳에서 동서울로 가서 다시 2호선 전철을 타고 화곡역으로 가서 다시 버스로 ~~~

힘겨운 하루,

대중교통입니당...ㅋ

 

안동시 관광 안내판

 

암튼 이렇게 무사히 산행을 모두 끝냈습니다.

낙동정맥도 이제 한번만 땜방을 하면 모두 끝이 나네요~~ㅋ

또한 9정맥도 거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