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과 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byun4do 2018. 1. 29. 18:29

 

p.185~187

 

이해가 가?

전구가 꺼지듯 어느 날 갑자기 빛이 사라져버린 거야

유리처럼 굳은 외형은 그대로지만 도리어 무서운 얼굴이란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았어.

그때 알았지, 인간의 영혼은 저 필라멘트와 같다는 사실을.

어떤 미인도 말이야...

그게 꺼지면 끝장이야.

누구에게라도 사랑을 받는 인간과 못 받는 인간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만큼이나 커.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실은 대부분의 여자들...

그러니까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거나...

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極)을 가진 전선과 같은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 건 실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주기 때문이지.

너무 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

 

그건 단순한 불빛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무수한 사랑이 여름날의 반딧불처럼 모이고 모여든 거야.

그래서 결국엔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경우도 많지.

교만해지는 거야.

그것이 스스로의 빛인 줄 알고 착각에 빠지는 거지.

대부분의 빛이 그런 식으로 변질되는 건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도 결국은 개인일 뿐이야.

자신의 삶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미인도 불 꺼진 전구와 같은 거지.

불을 밝힌 평범한 여자보다도 추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는 거야.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하나의 전구를 터질 듯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지.

실은 골고루 무수한 전구를 밝혀야만 세상이 밝아진다는 걸 몰라.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또 자신의 주변은 어두우니까...

그들에게 몰표를 던져.

가난한 이들이 도리어 독재 정권에게 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싶은 인간들이 스크린 속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헌납하는 것도 모두가 그 때문이야.

자신의 빛을...

그리고 서로의 빛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 기대하지 않고...

서로를 발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야.

세상의 어둠은 결국 그런 서로서로의 어둠에서 시작돼.

바로 나 같은 인간 때문이지.

스스로의 필라멘트를 아예 빼버린 인간...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 않는 인간...

그래서 난 불합격이야.

나에게 세상은 불 꺼진 전구들이 끝없이 박혀 있는 고장 난 전광판과 같은 거야.

너랑은 다른 거지...

 

 

 

p.224~225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꿈같은 일이란 실은 별다른 일이 아니야.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꿈같은  사랑이란 것도 별다른 게 아니지.

그냥 살아가듯이 그냥 사랑하는 거야.

기적 같은 사랑이란 그런 거라구.

보잘것없는 인간이 보잘것없는 인간과 더불어...

누구에게 보이지도, 보여줄 일도 없는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야.

이쁘지도 않은 서로를, 잘난것도 없는 서로를...

평생을 가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릴 일 없는 사랑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나가는 거지.

왜,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이 얘기야.

기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한 줌의 드라마도 없이...

어디 좋은 곳 한 번 가보지 못한 채...

어딜 가봐야 눈에 띄지도 않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이...

이를테면 부인께서 참 미인이십니다 라든가, 그런 소리 한 번 듣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서로를 버리지 않고, 버릴 수 없어 서로를 거두는...

여보 이제 어쩌지?

이런 걱정을 매일같이 하면서도...

제아무리 어떤 놈이 세금을 거두고 새마을 운동을 시키고 해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그런대로...

어쩌지 밥을 새로 해야 하는데, 하면서...

말하자면 영화화 될 리도, 될 일도 없으면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데도...

근근이 놀러간 여행지에서 잇몸을 다 드러낸 사진 한 장 찍어가며...

그래도 남는 건 사진뿐이더라, 해가며...

가끔은 불쌍해서...

살아갈수록 자주 불쌍해서...

그렇다고 돈 한 푼 생길 일도 아니면서...

그래선지 이 웬수야 웬수야 해가며...

도대체 어쩌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냥 서로를 사랑하는...

신문과 방송이 외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야.

어때, 예수가 걸친 옷만큼이나 초라하지

 

'기적이란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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