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낙남정맥 5차, 복룡재~팔재산~만학골재~갑사~갑사돌아보기
일 시: 2016년 5월 22일(21일 무박출발)
거 리: 21.05km
들머리: 복룡재(충남 공주시 이인면 이인리 9-10번지 일원)
날머리: 만학골재(충남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 454-7번지 일원)
단속으로 인한 산행중지, 갑사로 이동 후 중지결정 후 갑사 둘러보기.
시간대별 진행
02:00 - 들머리 도착(30여분 수면) => 02:54 - 산행 시작 => 03:16 - 120봉 => 03:24 - 150봉 =>
03:51 - 시멘트 도로 => 04:23 - 성정산 => 04:37 - 반송고개 => 05:57 - 노성지맥분기점 =>
06:13 - 안골산 => 07:04 -아침식사 => 07:38 - 산행시작 => 07:45 - 널티재 => 08:36 - 팔재산 =>
08:51 - 중장고개 => 09:09 - 265봉 => 10:34 - 만학골재 => 11:21 - 갑사 입구도착 =>
11:41 - 갑사 경내 둘러보기 => 12:36 - 갑사 입구(종료) => 13:17 - 갑사주차장 산행종료 =>
용화사 이동 B코스 합류 후 뒷풀이식당 이동.
총 산행시간 -- 09:50분
산행시간 -- 08:10분
휴식시간 -- 1:39분
산행후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했습니다....ㅋ
아무래도 저하곤 천단이 연이 없는지 이번에도 못보고 돌아 왔네요.
계룡산 구간 단속을 염려했지만 그렇게 걱정은 안했는데,
엄한데서 제동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충북일보엔 나왔다는데 뜬금없이 주민의 민원으로
산행지에 단속이라니....
이런 경험도 흔치않을 것 입니다.
암튼 순방향으로 산행을 했다면 더 수월하게 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암튼 죽을 맛이었네요.
어지간해선 다리에 알이 배는 것이 없었는데 오늘은 다리가 마이 묵직합니다.
이틀은 가겠네요.
산행로는 완만한 곳도 있지만 대체로 고도차가 있어 오르내림의 연속입니다.
날씨는 새벽엔 좀 쌀쌀했고 낮엔 더움
박무로 조망은 그렇고 천단 때문이라도 다음에 다시 와야겠네요.
들머리 복룡재에 도착해서
이번 산행은 정상진행이 아니고 반대로 진행하기로 해 용화사가 아닌 이곳으로 왔습니다.
단속을 염려해서인데 결과적으로는 망했네요.
그런데 냄새가 장난이 아닙니다.
이곳에 사시는 분들은 어떻게 견디시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다른 회원님이 근처에 이인휴게소에서도 이 냄새가 엄청 난다고 하시네요.
방향이 맞다 아니다 약간의 설왕설래 후 본격적인 산행을 진행 합니다.
처음부터 밤밭이 장난이 아닙니다.
120봉
150봉
이곳엔 무엇을 하시는가 한참을 철조망을 따라서 걷습니다.
터가 좋은가요, 아니면 지리적으로 편안한가
암튼 근처엔 가족묘에서 공동묘지까지 참 많습니다.
진행중 요기서 직진아니고 좌틀해야 합니다.
살짝 알바.
잡목도 쉬 진행을 못하게 합니다만 아직은 등로는 그냥저냥 합니다.
시멘트도로
이곳 근처에도 밤밭이 엄청나답니다.
도로를 살짝 내려서서 철문으로 고고씽~
공동묘지인듯 엄청 묘가 많습니다.
잡목이 참 많습니다.
시작 설명에 잡목지대라고 했는데 역시
길도 거시키해서 약간의 알바, 아주 약간씩은 하면서 진행합니다.
공주가 밤으로 유명한데 이름값을 하네요.
달님도 살짝 보이고~
또 밤나무.
성정산(성항산)정상안내판
매곡당 김경숙님이 성정산에 유래에 대해서 안내판을 붙여 놓으셨네요.
반송고개
고개에서 살짝 내려와서,
멀리 우측 끝쪽에 계룡산 안테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노성지맥분기점안내판
잡목이 차암 많습니다....ㅠㅠ
우측으로
이번에도 고사리와 취나물을 좀 땃습니다.
안골산정상안내판
밭을 가로질러 갔는데 나중에 보니 우측으로 살짝 돌아가도 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 모여 아침을 드십니다...ㅋ
이번에도 비빔밥을 맛나게~~
다시 산행준비를 합니다.
널티재가 보이네요.
바로 옆 인삼밭인데 인삼이 엄청 큽니다.
널티재
바로 옆 23번 국도를 넘어갈 수 없어서 지하차도로 약간 우회해 갑니다.
계량소 방면으로 약 50여m 정도 간 후 다시 빽도~~
요길 지나서 좌측으로
지도상엔 이길을 좀 더 지나야 하지 않나 생각이~
할미꽃이 참~~~~ㅎ
이제 계룡산도 한결 가까워 졌습니다.
팔재산을 오르기 전에 엄청 넓은 드릅재배지가 있네요.
팔재산정상안내판
약간의 너덜을 지나고,
중장고개(윗장고개) 691국도
265봉
만학골재로 내려서는 길이었습니다.
거의 다 내려왔는데 회원 한분이 길을 막아섭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아래에 감시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한참을 생각해도 모르겠던데 암튼 단속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내려가신 두분이 걸렸다고....
잠시 쉬면서 인터넷을 검색하니 몇년전에는 단속을 했던 기록도 나오는데 이곳은 단속구간도 아니고
그래도 찜찜해서 좀 기다리다 혼자 내려서는데 고개에서 단속을 하고 있네요.
하는수 없이 우회해서 아래 가계로 내려섭니다.
본진이 내려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립니다.
덕분에 물이 좀 없었는데 시원하게 잘 먹었네요.
만학골재 바로 아래에 있는 가계.
저 위가 만학골재입니다만
감시원때문에~~ㅠㅠ
회원중엔(저도) 이곳에서 우측 버스뒤로 그냥 치고 올라가자고 했는데 식당주인의 말과 팀장님은
또 금잔디고개에서 기다릴지 모르니 갑사로 이동해서 올라가자고 합니다.
본이아니게 갑사를 가게되었습니다.
도로를 따라서 이동
갑사주차장엔 버스기사님들이 이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갑사입구
갑사입구에서 다시 토론이 이어집니다.
대체적인 생각이 어차피 구간을 다 못 뛴다면 다음에 다시 오는게 좋겠다는 중지입니다.
그래서 산행은 이곳에서 종료하고 갑사를 구경하고 이동하는 것으로 합니다.
갑사일주문
|
영규대사에 관한 비를 열심히 보시네요.
영규대사는 갑사에서 출가하여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어 항상 이절에서 주석하고 있었는데,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해 여름에 왜구가 청주지방까지 이르러 청주가 점거 당하자 이에 영규대사는 승려 700명을 엄격히 선발하여 승군을 일으켰으며
청주지방의 승려 300명도 참여한 1000명의 승군으로 홀로 싸웠다. 8월에 영규대사의 승군이 청주를 쳐들어가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왜병과 싸워 청주를 되찿았다.
한편 금산에 있던 초토사 고경명 군대가 왜군에게 패전하여 왜적이 다시 창궐하고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려 하자
영규대사는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곧바로 금산의 외곽에 진영을 갖추고 있을 때 왜병이 쳐들어와 조헌이 먼저 전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와 의병들이 전의를 잃고는 의병장 조헌이 이미 죽고 적은 더욱 기승을 부리니 물러섬만 같지 못하다고 퇴각하자는 간청이 있었으나
오히려 영규대사는 그들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게 되면 죽는 것이거늘 어찌 홀로 살겠다고 하겠는가라고 크게 호통을 치고는
흐트러진 전력을 다시 가다듬어 사력을 다해 종일토록 싸웠으나 그 또한 전사하였다.
이로써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왜병과 싸움으로써 왜군의 호남침공을 끝내 저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을 일으킨 것은 영규대사가 처음으로 그 뒤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그의 충의를 포상하여 복국우세기허당일합대선사를 추증하고 당시의 뜻을 기리도록
갑사에 표충원을 세워 휴정과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공주시 겨룡면 유평리에 묘가 있다.)
철당간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갑사(甲寺)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네 면에 구름무늬를 새긴 기단(基壇) 위로 철당간을 높게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다.
당간은 24개의 철통을 연결한 것인데 원래는 28개였으나 고종 30년(1893)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당간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며 꾸밈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안쪽에 구멍을 뚫어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기둥머리의 곡선과 기단부의 단순한 조각이 잘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 전기인 문무왕 20년(680)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보물 제257호. 높이 205cm. 원래 갑사 뒤쪽의 계룡산에 있던 것을 1917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8각의 높은 지대석 위에 3층으로 된 하대석과 탑신, 옥개가 있는 8각원당형 구조이다.
하대석의 모서리에는 피어나는 연꽃을, 각 면에는 1구씩의 사자를 조각했는데 환조에 가까운 입체감을 준다.
그 위에는 구름 속에 있는 용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었고, 운룡문과 사자상 사이에 홈이 파져 물이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중대석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양각되어 있으며, 각 모서리에는 꽃봉오리 같은 장식이 돌출되어 있다.
상대석 밑에는 높은 부연이 있으며 그 윗면에 32엽의 복련이 돌아가며 장식되어 있다.
팔각형 탑신석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우고, 앞뒤 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기고 그 좌우면에 2구의 사천왕상을 각각 배치했다.
옥개가 기단이나 탑신부에 비해 높고 폭이 좁은 편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옥개 밑에 작은 서까래를 촘촘히 새기고, 지붕 위의 낙수면에는 목조건축의 팔모지붕을 모방해 굵고 네모난 우동 사이로 가늘고 긴 기왓골을 표현했다.
상륜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뒤에 보수한 보주만 놓여 있다.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매우 장식적이며 목조건축의 세부까지 표현했으나 전체비례에서 옥개석이 유달리 작아진 점이나
기단부의 장식문양과 뛰어난 조각솜씨 등으로 보아 신라승탑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려승탑의 우수한 예로 평가된다.
대적전의 뜻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本殿)으로 건립하여
≪화엄경≫에 근거한다는 뜻에서 화엄전(華嚴殿),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는 뜻에서 비로전(毘盧殿),
그리고 ≪화엄경≫의 연화장세계가 대정적의 세계라는 뜻에서 대적광전이라고도 한다.
이 대적광전에는 원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원래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불로는 비로자나불·아미타불·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찰에서는 선종(禪宗)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의 삼신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비로자나불의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봉안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법당 내 오불(五佛)을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삼신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봉안하며,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약사여래의 협시보살로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하게 된다.
이 경우 약사전(藥師殿)과 극락전(極樂殿)을 대적광전에서 함께 수용한 형태로, 우리
나라에서 중요하게 신봉되는 불보살들이 모두 한 곳에 모인 전각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볼 때 대적광전은 사찰 내에서 가장 큰 당우가 된다.
후불탱화(後佛幀畫)는 전각의 규모에 따라 1폭의 삼신탱(三身幀)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법신탱·보신탱·화신탱 3폭을 각각 불상 뒤에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대적광전의 위치가 대웅전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보통 신중을 모신 신중단(神衆壇)과 영가를 모신 영단(靈壇)을 함께 마련하게 되며,
신중단에는 신중탱화를, 영단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畫)를 봉안한다.
내부의 장엄도 화려하여 보통 주불 뒤에는 닫집인 천개(天蓋)를 만들고 여의주를 입에 문 용 등을 장식하며,
천장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과 연화문(蓮華文) 등을, 벽의 상단에는 화불(化佛)과 비천(飛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이 전각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의 대적광전과
전라북도 완주군위봉사(威鳳寺)의 보광명전(普光明殿)을 들 수 있다.
파전에 막걸리로 ~~~ㅋㅋ
장녹나물이랍니다.
몬고해서 확인해 보니,
요즘 제철 나물인 ‘장녹’이라고도 하는 자리공이란 식물이 있다.
흔히 자리공에 “독성이 있다”고 하여 꺼리는 경우가 있지만, 말려두었다가 나물로 볶아먹는다던가 된장국에 넣어 먹으면 아주 좋다.
식감도 좋은 뿐더러 향기. 맛이 일품이다.
‘장녹’은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주로 어린잎을 나물(초무침이 좋다)로 무쳐 먹는데 “관절염에 특효가 있다”라고 한다.
뿌리는 신장병, 이뇨제로 쓰인다.
장녹잎을 끓는 물에 충분히 데친 후 몇 시간에서 하루 동안(보통 3-4시간)물에 담궈서 독성을 뺀 다음에 나물로 해 드시는 것이 좋다.
자리공은 인근 산에 4, 5월에 돋아나는데 있는 곳에는 지천으로 깔려있으며,
본초강목에 귀한 나물로 소개되고 있고 경상도 지방 뿐 아니라 충청도에서는 '장녹'이라고 하여 귀한 나물로 대접받는다.
자리공의 뿌리가 사람과 비슷한 모양새를 한 것은 불가사의한 효력이 있다고 한다.
적백의 2종류가 있는데 백색인 것은 약용하고, 적색인 것은 매우 유독하다고 ‘명의별록’에 기록돼 있다.
따라서 약재로 사용할 때는 반드시 한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 |
||
▲ 이것이 장녹 |
뿌리는 독성이 강하여 물로 깨끗이 씻은 후 잘게 썰어 약탕기(도자기 냄비 등)에 넣고 물을 충분히 부어 중불로 6시간이상 끓이면 독성이 제거된다.
달인 물에 다시 물을 부어 녹차 끓이듯이 연하게 하여 차 마시듯 틈틈이 마시면 된다.
맛은 옥수수 수염차와 비슷하며, 간(소금)맛이 느껴진다. 마시다 보면 소변 소통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시도 있네요.
장녹 나물 : 우보 임 인 규
어린 싹은 연하고 약해서 아직은 먹을 만한 순진함이 데치고 된장에 조몰락거린다.
대가리 자라면 새까만 양심이 짙어져 잡는 순간에 물드는 거짓말
머리는 생각을 몸은 버티는 삶을 욕들이 독으로 뿌리에 안긴다.
아린 것이 인생인데 그래도 어린것들은 낫다. 조몰락거린 된장 맛 순수하다.
뒷풀이식당.
꼬기 좀 먹었습니당....ㅋ
사진은 엄써요, 다 아시니~
횟집도 있습니다. 참고
마지막까지 열심히~~
오늘은 참 힘들었습니다.
컨디션때문에 나중에 알까정은 아니어도 몇일 힘들었네요.
그리고 천단.
천단은 이번에도 인연이 안되네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금남정맥(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남정맥 7차 복룡재~부소산~구드래나루터 16.06.12 -1 (0) | 2016.06.13 |
---|---|
금남정맥 6차 용화사~큰서문다리재(용천재)~계룡산~만학골재(5차 미진행구간 땜방산행) 16.05.29 (0) | 2016.05.30 |
금남정맥 4차 덕목재~함박산~큰서문다리재(용천재)~용화사 15.05.08 -2 (0) | 2016.05.09 |
금남정맥 4차 덕목재~함박산~큰서문다리재(용천재)~용화사 15.05.08 -1 (0) | 2016.05.09 |
금남정맥 3차 오항동재~대둔산~덕목재 16.04.24 -2 (0) | 2016.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