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 37차 산행
*일 시: 2013년 09월 14일(토) 03:30~
*장 소: 지기재(들머리)~개머리재~백학산~윗왕실~개터재~회룡재~
큰재(날머리, 19.92km)
*들머리: 지기재 - 경북 상주시 모서면과 상주시 내서면을 잇는 901번 국도상 정상부근.
*날머리: 큰재 - 경북 상주시 모동면과 상주시 공성면을 잇는 68번 국도상
백두대간 숲 생태원 앞.
*소요시간: 06시간 45분(후미기준: 07:45 - 산행시작 ~ 14:35 - 산행종료)
총 휴식시간 1시간 30분(점심시간 40분, 휴식시간 약 50분)
*도상거리: 19.92km(시간당 약 3.0km/h)
*총거리: 734.65km 중 -**- 589.42km 종주.
*날 씨: 도착부터 엄청 비 산행내내 장대비와 조금 약해지기도 함.
산행 끝부분 개이고 해도 조금 나옴.
*참석인원: 총 20명.
- 운 영 진: 오키짱님, 강과산님, 무주상님.
-최우수회원: 다알리아님, 자유사랑님, 설봉님, 노찌님.
-우 수 회 원: 마당바위님, 산들바람님, 마른장작님, 부르토님.
- 정 회 원: 링컨님, 시나브로님, 카우보이님, 현술이님, 이네아빠님.
- 준 회 원: .
-특 별 회원: 다움님, 푸른소금님, 변사또.
-불 참 회원: 산애강애님.
*산행지도, 고도표:



*시간대별 산행기록:
04:10 - 선학역 출발
05:50 - 옥산휴게소(아침매식) 도착
07:27 - 지기재(들머리) 도착
07:45 - 산행시작
08:35 - 개머리재 도착 (5)
09:20 - 백학산 밑 임도 도착 (15)
09:50 - 백학산 도착 (20)
? - 윗왕실재 도착(점심) (40)
? - 개터재 도착
? - 회룡재 도착 (10)
14:35 - 큰재(날머리) 도착
*산행후기글*
출발부터 비가 많이 온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우중산행은 피할 수 없을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코스도 별 특징이 없고 날도 궂고 회원님들이 오시기 어려운 조건이어서 힘들었지만,
산행은 계속됩니다.
구나저나 산애강애군은 아무리 전활해도 연락이 안됩니다..........ㅠㅠ
아주 편안하게 주무셨다나 뭐라나.......
암튼 출발을 한시간 앞당겨 새벽 3시 30분에 진행을 합니다.
버스가 많이 막히리란 생각에서인데 그래서인지 막힘없이 버스는 새벽을 뚫고 옥산휴게소에 도착해
아침을 먹습니다. 가져온 라면과 김밥으로 배불리 먹고(김밥 찬조해 주신 오키짱누님 감솨.^^)나니
갑자기 폭우로 변해 빗님이 줄기차게 내리내요.
출발하고도 간간히 빗줄기가 굵어서 내심 졸면서도 걱정을 했는데, 이곳 휴게소에선 다행이도
라면을 먹고 정리가 끝난 후 내려서 괘안했지만 날씨에 대한 생각은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좀 나아지려니 생각을 하며 오늘에 들머리인 지기재에 당도합니다.
지기재.
지기재에서 당도하니 그래도 빗줄기가 수그러들줄 모르고, 잠시 준비를 하던 저희는 그냥 진행을
하기로 하고 모두 단단히^^ 준비를 하고 출발합니다.
전엔 날이 참 좋았던 지기재는 오늘은 굵은 빗방울로 저희를 방기내요.
두번이나 카메라를 망가트린 전 이번엔 아쉽지만 카메라를 차에 두로 갑니다.
아쉽지만 또 거시키하면 안될 것 같아서리....ㅠㅠ
포도밭을 지나 수풀이 우거진 산행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는데,
처음부터 아예 다 젖을 것을 예상하고 시작하는 산행이라 오히려 마음은 편하고 시원한 빗줄기를
즐기기만 하면 되니 걍 고고씽입니다.....ㅋ
그렇게 산행로와 임도를 살짝 오가며 50여분 만에 개머리재에 당도합니다.
비가 많이 오는 통에 쉬어가기도 불편하고 해서 진행을 좀 빨리 하고 있습니다.
개머리재(소정재, 290m)
산세가 개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개머리재라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소머리를 닮았다고
소정재라고도 합니다.
포도밭 다시 포도밭을(정말이지 이 동네는 유명한 포도 산지답게 곳곳에 포도밭이 있습니다.) 지나고
이번엔 후미가 오는 것을 기다려 살짝 포도 한송이를 따 먹었는데 맛이 영~~~~ㅠ
상품가치가 없는 것이여서 그런지 우~~ 암튼 살짝 알바?를 한 후미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산행을 이어갑니다.
고저가 많이 차이나지 않는 마루금을 계속 이어갑니다.
빨리 진행하는 속도를 의식은 하지만 편히 쉴 수도 없으니 오늘은 속도를 더 내봅니다.
개머리재에서 약 40여분을 달려 임도에 도착합니다.
이제 백학산이 지척입니다만 후미를 기다려 출발하려 합니다.
쉬는 김에 단체 사진도 찍고 다행이도 소금님의 속도도 빨라 많이 쳐지지 않고 오시니 오늘은
빨리 진행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안내판에는 3.6km를 누군가 0.6km로 바꾸어 써놓았는데, 블러그에 올라온 글들중 상당수가 방향을
보는건 괘안한데 거리나 시간은 참고사항이 아니라는 말씀들.... 맞습니다....ㅋㅋ
약 15분여를 땀을 빼고 된비알을 오르니 오늘 산행의 최고봉 백학산이 나타나네요.
백학산(白鶴山, 615m)
"상주시 공성면, 내서면 중화지구에 위치하며 정상부 아래에 효곡리 왕실마을을 백학이 알을 품듯
감싸 안은 포란지세(包卵之勢) 형상이라 하여 백학산이라 지명되었다고 합니다.
백학산 북동으로 발원 내서면을 경유 북천이 되어 낙동가에 합류되고, 남서로 판곡지에 유입되
반계천이 되고 금강으로 흘러간다".
정상에서 일일이 인증을 해주시는 강과산형님의 수고로움 덕분에 회원님들이 추억을 하나 더
남기고 잠시 행동식을 드시며 휴식을 취하는데 빗물에 섞어 먹는 막걸리 맛은 ....ㅋㅋ
추억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소소한 재미에서도 남길 수 있으니 참 편합니다.
암튼 이네아빠형님이 홍삼 스틱 하나을 넣은 소주 한잔을 설봉형님은 짐짓 모르시는듯 혼자서 원샷.....
그 원망을 뒤로하고 웃기만 하시니 에고고~~~~~ㅠㅠ^^*
그때는 정말 절교라도~~~~~~ㅋㅋㅋ
소주 한잔에 아니되겠지요...^^
아직은 식사를 하기가 일러 좀 더 진행을 합니다.
열심히 길을 재촉해 당도한 곳이 윗왕실재입니다.
윗왕실재
산세가 왕궁과 같다 하여 당초 왕재라 하였으나 민초들이 왕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어 사이에
실자를 넣어 왕실재로 불렀다고 합니다.
생태통로 위에서 잠시 쉬다가 번뜻 지하통로에서 식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아래로 내려오니
그리 크지는 않지만 충분히 비를 피하며 식사를 할 수 있겠습니다.
후미에 무전을 해보지만 연락이 안되고 그래도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니 소리를 듣고 내려 오시겠지
한가닥 생각에 열심히 밥을 먹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니 오셔서 어찌어찌 연락이 되니 계신 곳이
아무래도 저희와 멀게만 느껴지는데, 이 때만 해도 후미가 알바를 하는줄 알아 어쩔수 없이 식사를
마져하고 다시 산행을 시작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여 개터재에 당도전에 연락이 안됐던 후미그룹을 만납니다.
다행이 별 사고는 없고 방가운 얼굴을 보았으니 괘안한데 전후 사정을 들으니 저희가 식사를 했던
윗왕실 생태통로를 지나면서 뒤에 두분은 떠드는 소릴 듣기는 했는데 무시하고 걍~
진행을 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알바를 하시는가 했더니 오히려 저희보다 더 앞서 계셨던 거지요.
그렇게 다시 진행을 하고 옛고개라 글을 써놓은 곳에 도착하는데 이곳이 개터재입니다.
개터재(380m)
"일설에는 민초들에게 유용한 식량을 제공할 날짐승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개터재라 하는가 하면
산세의 모양이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왕실마을에서 개터골로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로 주위의 마을 이름을 따서 왕실재,
효곡재로도 불리고 있다 하며 왕실(旺室)이란 지명의 유래는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임금이 사는 구중궁궐처럼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효곡리는 이 마을에 열녀와 효자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다시 산행을 이어 마루금을 넘어갑니다.
계속 완만한 능선을 따라서 가니 회룡재가 나타납니다.
회룡재(340m)
지형이 마치 용이 뒤를 돌아보는 산세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용이 회귀한단 뜻을 지녔다고 합니다.
하늘도 조금씩 개여 회룡재에 당도할때쯤 비는 그치고 산행하기엔 훨씬 편해졌네요.
간단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다시 고고씽~~~
비도 그치고 산행도 수월하고 마지막 얼마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발길이 오히려 더 빨라집니다.
마지막 큰재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앞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생태원을 방문한 방문객들이 산책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지요.
편안하고 차분한 인상이 역시 "숲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는구나 절로 생각이 듭니다.
몇몇의 분들이 생태원을 돌아보고 우리 일행은 알탕을 어찌하나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이럴수가 생태원 정문 앞에 있는 수도가 시원한 물을 펑펑 내어줍니다.
이곳을 지나면서도, 그걸 보고도 생각을 안했는데 정말이지 오아시스입니다.
모두들 다른 분들이 보시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빨고(입은채로...^^) 몸을 닦고 정말 시원한
시간을 보내었네요.
정말 큰 축복과 다름없었습니다.....ㅋㅋ
한참을 회원님들이 씻고 물건을 정리하고 문을 나서니 경상북도 숲 생태원이란 간판이 나타납니다.
오늘에 날머리인 큰재에 당도했습니다.
큰재(320m)
"예전엔 우하재라고 불리웠고 추풍령 쪽에서 다가가면 평지의 고원지대 같은 곳으로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지만 상주의 옥산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골짜기가 깊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보여서 큰재라는 이름을 얻었는가 하면,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 되는 곳이기도 하고,
공성면 신곡리,간하리,장동리와 도곡리로 나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백두대간 사이에 있는 유일한 초등학교인 옥산초교 안성분교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상주시에서 60여억을 투자해 백두대간 생태 학습장으로 조성,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저도 답사를 위해서 반대쪽에서 올라올땐 골짜기가 상당히 깊더니 이곳에서 추풍령으로 이동할땐
거의 평지같아서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아무튼 이로써 상주 지방은 모두 산행이 끝났습니다.
원래라면 이곳 큰재에서 추풍령으로 남진해야 하진만 일정을 변경해 이곳을 더 먼저 산행 했으므로
이곳 상주는 다시 올 일이 없는 것이지요.
다음 38~40차 산행은 설악산 미진행 구간이고 그곳도 끝이나면 덕유산의 빼재부터 다시 산행을
이어가니 이곳 상주와 화령의 옛지명, 중화지구대에 관해서 다시 둘러보고 올라갑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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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尙州)
삼국시대에는 신라에서 경주 다음으로 큰 고을이었다. 또한 삼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격심한 전쟁을 치러야했던 격전지로 아주 긴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낙동강 중류지역의 중심지였던 창녕 일대가 비사벌주(比斯伐州)라면 상주(尙州)는 상류지역의 중심지로
신라의 사벌주(沙伐州)로 말기에는 아자개가 점령을 하고 그의 아들 견훤은 후백제를 일으켰으나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격화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신검에 이르러 왕건에게 몰락하게
되는 후삼국시대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상주는 일찌감치 삼백 (쌀,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으로 자리 잡으며 중국의 낙양으로 불릴 만큼
아름답고도 유서 깊은 곳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이에 칠백 리 물길을 자랑하는 낙동강이란 이름이 낙양(상주)의 동녘을 흐르는 강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면 조선조에 와서 경상도란 지명도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명명할 만큼
상주는 예로부터 아주 중요한 고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북 깊숙한 내륙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외지면서 발전보다는
오히려 소외든 느낌이 드는 곳이다.
중화지구대(中化地溝帶)
백두대간 마루금을 경계로 하고 상주시에 속한 6개면 중 모서면.모동면을 “중모현”이라 했고
화동.화남.화서.화북을 “화령현이라 했으니 상주목에 속한 중모현과 화령현을 합하여
”중화지구“라고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답달비군”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화령군”으로 고쳐 부르다
고려시대 때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던 화령은 고종32년 상주군 화령면으로
명명되어 현재(상주시 화령면)에 이르고 있다.
화령 옛이름은 '물가의 큰 산'의 뜻인 '답달
'답'은 '닿음(접함)', '달'은 '산'의 옛말
'영남(嶺南)'이니 '영동(嶺東)'이니 하는 지금의 지역 이름들은 백두대간이 낳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또, 지금의 함경도 지방을 나타내는 '관북(關北)'이나 평안도 지방을 나타내는 '관서(關西)'라는 지역
이름도 백두대간의 철령(鐵嶺)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 한다. 철령은 함경남도 안변 근처의 큰 고개. '영남'의 영(嶺)은 백두대간의 줄기 중에서 조령, 죽령 등의 고개를 말할 것이다.
□ 고려시대엔 상주가 '영남도'의 중심 '영남'은 '고개 남쪽' 의미의 일반명사처럼 들리는 이름이 되어 버렸지만, 사실 이 이름은 꽤
오래 전에 하나의 도(道) 이름으로도 씌어 왔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오늘날의 도제(道制)를 최초로 실시하여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하여 지방장관인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였다. 당시, 백두대간 남쪽의 상주는 영남도(嶺南道)라 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12주 48현을 관할하였고,
경주는 영동도(嶺東道)라 하여 경남지역 9주 35현을, 진주는 산남도(山南道)라 하여 역시
경남지역 10주 37현을 소관하였다. 당시 전국 10도의 영역은 다음과 같았다. ① 관내도(關內道)-지금의 경기·황해도(개성이 중심) ② 중원도(中原道)-지금의 충청북도(충주가 중심) ③ 하남도(河南道)-지금의 충청남도(공주가 중심) ④ 강남도(江南道)-지금의 전라북도(전주가 중심) ⑤ 영남도(嶺南道)-지금의 경상북도 일부(상주가 중심) ⑥ 영동도(嶺東道)-지금의 경상남도 일부(경주가 중심) ⑦ 산남도(山南道)-지금의 경상남도 일부(진주가 중심) ⑧ 해양도(海陽道)-지금의 전라남도(광주가 중심) ⑨ 삭방도(朔方道)-지금의 강원·함경남도 일부(강릉이 중심) ⑩ 패서도(浿西道)-지금의 평안도(평양이 중심) 따라서, 오늘날 경상도 지역을 영남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1천여 년 전 '영남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영남도'는 지금의 상주(尙州)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경북 지방 일대를 가리켰기에
고려시대엔 '영남'이라 하면 지금의 경상도 전체를 가리키기보다 주로 상주 일대를 가리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주가 고대와 중세에 상당히 비중 있는 고을이었다는 것은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란
이름이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첫 음(音)을 따서 나온 것임을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고려 현종 3년(1012년), 상주에 안동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하여 경주와 진주 지역까지 관할하였던
것을 보아서도짐작할 수 있다.
※ 그 뒤, 안동대도호부는 경주로 옮기고, 안동에는 안무사(安撫使)를 설치하였다. 본래 삼한(三韓) 시절에 사벌국(沙伐國)이라 했던 상주는 삼국·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하나의 고을 형태가 아닌 거의 작은 소국(小國)에 가까운 것이었다. 상주는 조선 태조 때 두어졌던 관찰영(觀察營)이 선조 14년(1596)에 대구로 옮겨지기 전까지 사실상
도(道)의 행정 중심지였다.
□ 백두대간의 넓은 지역을 껴안았던 화령 고을 주(州) 설치 제도가 없어져 옛날과 달리 지금의 상주는 현재 여러 개의 고을(시·군)을 껴안고 있지
못하지만, 지금의 상주시 읍면의 이름들만 보아서도 옛날에 여러 고을이 합쳐진 지역이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상주시의 읍면 이름에서 '∼동면(∼東面), '∼서면(∼西面) 형식의 것이 많은 것은 지금의 상주시가
여러 고을을 껴안은 것임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동면', '서면' 하는 식의 이름은
어느 고을의 동쪽, 서쪽 지역임을 가리키는 까닭이다. 상주시는 옛날 이 일대에 있었던 예닐곱 정도의 군현(郡縣)이 합해져 이루어졌는데, 합해진 각 군현의
이름이 그대로 상주 속의 읍면 이름으로 남거나 여기에 '동', '서' 등의 음절이 덧붙여져 방위식
면이름으로 바뀌었다. ·상주(尙州) 본고을→전 상주읍(尙州邑), 사벌면(沙伐面), 은척면(銀尺面. ※은척산 이름을 땀),
중동면(中東面), 내서면(內西面), 외서면(外西面), 외남면(外南面) ·공성현(功城面)→공성면(功城面) ·중모현(中牟縣)→모동면(牟東面), 모서면(牟西面) ※ '중모'의 '모(牟)가 바탕 ·청리현(靑里縣)→청리면(靑里面) ·함창현(咸昌縣)→함창읍(咸昌邑), 공검면(恭儉面)(공갈못 이름을 땀) ·함창현의 이안부곡(利安部曲)→이안면(利安面) ·화령현(化寧縣)→화동면(化東面), 화서면(化西面), 화남면(化南面), 화북면(化北面)
※ '화령'의 '화(化)'가 바탕 ·장천부곡(長川部曲)→낙동면(洛東面) ※ '낙동(洛東)'은 '가락의 동쪽'이란 뜻으로 상주의 옛이름 6개의 행정동과 18개의 읍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재의 상주시는 그 관할 안에서 이처럼 옛날에
포함했던 각 고을의 이름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화령재는 옛 화령현의 이름에서 나와 상주 땅에 있는 화령재는 '화령(化寧)'이란 옛 지명 때문에 나온 것이다. 백두대간 능선상에서 백학산과 봉황산 사이를 잇는 화령재는 비록 낮기는 하지만,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고, 양국간의 치열한 싸움터이기도 했다. 사실, 추풍령에서 속리산 입구인 비재까지는 백두대간에서 가장 산세가 약하고 높이가 낮은 구간이다.
몇몇 산을 빼고는 3∼400미터가 고작인 자그마한 산들. 따라서, 이 구간에 있는 화령재는 백두대간의
다른 고개들에 비하면 고개가 무척 낮은 편이다. '화령재, 해발320m'라고 하는 고갯마루의 표석이
백두대간 고개 이름 치고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기에 위치상으로
보면 그 비중은 대단한데…. 마루에 있는 화령정에 오르면 편액 대신 걸어 놓은 안내문을 통해
그 오랜 옛날 성읍국가 시절부터 삼국의 싸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령에 쌓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빽빽이 적어 놓은 한자가 그나마 뚜렷하지도 않아 읽기는 그리 쉽지 않다. 화령재를 이 곳 사람들은 '화령잿말랑' 또는 '짓질재'라고도 한다. 한자를 한글로 옮길 때, 아마 '영(寧)'자처럼 표기가 까다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이 글자는 원음은 '녕'이지만, 표기하는 낱말에 따라 '녕' 외에 '령'도 되고 '영'도 되므로 여간 주의가
따르지 않는다. '안녕(安寧)', '강녕(康寧)' 등에서는 음 그대로 '녕'이지만, '귀령(歸寧)', '재령(載寧)', '부령(富寧)'
등에서는 '령'이 된다. 또, 두음법칙에 따라 써야 하는 한자 표기 원칙상 이 글자가 앞에 나오는
낱말에서는 '영거(寧居)', '영릉(寧陵)' 등처럼 '영'이 된다. 지명의 영월(寧越), 영해(寧海), 영변(寧邊)
등도 마찬가지. 두음법칙이 무시되는 북한에서는 이들을 '녕월', '녕해', '녕변' 등으로 쓴다. 옛날 '비사벌(비자화)'라고 했던 지금의 '昌寧'을 한글로 '창령'이라 쓰는 이가 있지만, 제대로 된 표기는
'창녕'이다. '녕'자 앞에 나오는 음절의 받침이 ㄴ이나 ㅇ일 때는 음 그대로 '녕'을 쓰게 되어 있는
원칙에 따른 것인데, 늘 사용하는 사람도 많이 헷갈린다. 낱말에서야 국어 사전이라도 살펴 표기 방법을 원칙대로 따를 수 있겠지만, 잘 쓰지 않는
인명 표기에서는 더욱 어렵다. 전직 장관의 이름인 '이어령(李御寧)'을 한자로만 적어 놓으면, '이어령'이 아닌 '이어녕'으로 써 놓는
실수를 낳을 수도 있다. 앞에 받침이 없는 글자가 있을 때는 '寧'을 '령'으로 적기로 한 원칙에 따라
여기서는 '령'이다. 백제의 25대 임금 이름 武寧王도 '무녕왕'이 아닌 '무령왕'이다. 조선 초 태종의
아들 讓寧大君, 忠寧大君을 한글로 '양녕대군', '충녕대군'이라 적지만, 孝寧大君은 '효령대군'으로,
같은 항렬로 들어간 '寧'임에도 한글 표기는 일치되지 않는다. 갑자기 국어 공부를 하듯 엉뚱하게 이야기가 흘렀지만, 이것은 백두대간에 있는 한 지명 '화령재'란
이름에 관해서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 대단한 고을이었던 옛 화령군 '화령재'에서의 '화령'만으로도 얼핏 고개 이름처럼 느껴지지만, '화령'의 한자는 '化嶺'도 '花嶺'도 아닌
'化寧'이다. 지금의 상주시 안의 화동(化東), 화서(化西), 화남(化南), 화북(化北) 등의 면이름들이 모두
이 '화령'이란 이름에 바탕을 둔다. <택리지>에서는 상주 이야기에서 한자가 다른 '화령'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고, 화령 서쪽은 충청도 보은(報恩)이다. 화령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고향이며---' 화령현은 신라시대에는 답달비군(答達匕郡, 沓達匕郡)이라 하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화령군(化寧郡)
으로 고치고, 곁의 도안현(道安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에 화령군이 되어
상주목의 속읍이 되었고, 그 뒤 조선시대까지 직촌(直村)이었다. 조선 중기에는 화령현으로 강등되어 또 상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화령현은 그 넓이로 보아서는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었다. 속리산(俗離山)에서 그 남쪽 백학산(白鶴山)까지 길게 이어진 백두대간 줄기 양쪽 지역을 이 고을이
위치하고 있었다. 신라 경덕왕 이후부터 '화령'이라 했던 이 고을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상주에 합쳐지면서 면(面) 단위의 행정구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름 '화령'만큼은
일제의 한반도 찬탈 이전까지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 깊이 입에 버린 지명이었다.
얼마나 지역이 넓었으면 이 고을이 상주 관내로 들어가 면(面)으로 될 때 여러 면으로 쪼개져
'화령의 어느 쪽 지역'이라는 식의 '화동(化東)', '화서(化西)', '화북(化北)' 등의 면이름이 되었을까. 화령현의 중심지는 지금의 상주 화서면 면소재지인 신봉리(新鳳里)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곳 화령장터엔 지금도 닷새마다 조촐하게게나마 장이 열리고 있는데, 장터 남쪽의 옛 다리인
화령교(化寧橋)는 전에는 화령장터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잦던 곳이다. 화령의 진산이라는 봉황산(鳳凰山)이 있는데, 이 산은 연산군 아들(중종)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胎峯山. 胎封山)으로도 불린다. 그 근처 봉촌리에는 화령 향교터와 화령고성(化寧古城)이 있고,
하송리에는 후백제의 견훤(甄萱: 900~935)이 말년에 대궐을 짓고 살았다는 대궐터가 있다. 옛날에는 보은에서 상주에 이르는 도로가 화령 고을의 중심을 지났다 속리산 남쪽 백두대간 자락 사면에 위치한 화령은 이처럼 대단한 고을이었다.
□ 화령의 옛이름 답달은 '물가의 산'이란 뜻 화령의 옛이름인 '답달'은 '닿은 산'의 뜻으로, 이 고을이 백두대간 서쪽 비탈에 위치하는 금강 상류
산간 분지에 있어 '물가에 접한(닿은) 산골'의 의미로 이 이름이 나왔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땅이름 중에 이와 유사한 연유('물가에 접함')로 의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다사지현(多斯只縣)-하빈현(河濱縣): 지금의 대구 달성군 하빈면 ※ 닷재(닿재) ·진임성(津臨城)-임진현(臨津縣): 지금의 경기 파주 문산읍 임진리 ※나루닷재 ·지답현(只沓縣)-기립현( 立縣): 지금의 경북 포항 남구 장기면 ※지닷골 '답달'은 <삼국사기지리지> 등에 '답달비(答達匕, 沓達匕)'로 표기되었는데, 여기서 '비(匕)'는
그 뜻과 관계 없이 앞음절과 뒷음절 연결을 위한 촉음차(促音差)인 것으로 보인다. '답달'에서의 '달'이 '산(山)'의 옛말이란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터여서 구태여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답달비'는 '닿음(臨.接)'의 뜻으로 새길 수 있는 '답'과 '산(달)'의 뜻인 '닯(달비)'의
말조각으로 나누어 해석함이 좋을 것이다. 답(닿)+닯(닯이.달비)
(※ '답'에서 말음 ㅂ은 복합어에서 흔히 나타나는 음 첨가. 좁쌀, 찹쌀, 입때, 접때) 그렇다면, 이 '답달'이 어떻게 해서 그 뒤에 '화령'으로 옮겨갔을까? 정확히 알려면 물론 신라 경덕왕(景德王)을 불러 모셔야 알 수 있겠지만,
경덕왕이 당시에 개명한 전국의 많은 이름들의 예를 살펴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연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즉, 답달비의 '비(匕)'를 이와 비슷한 글자인 '화(化)'로 취하고, 그 뒤에 뜻이 좋은 한자인 '령(寧)'을
붙여 하나의 새 지명을 탄생시켰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寧'은 뜻으로 보아서는 '편안함'이지만, 이 글자는 그 음을 빌어 어조사로 쓰는 예가 많다.
그리고, '차라리', '어찌' 등의 뜻으로 새기기도 한다.
 함께한 사진들 ....^^*

아침 매식을 위해서 들린 옥천휴게소
오늘은 하늘이 좀 거시키 합니다만 라면을 끓여서 먹기로....ㅋ
오키짱누님이 김밥을 열줄이나 찬조해 주시공, 감사합니다.
강과산형님은 너무 맛있게 드시넹~~~~ㅎ
구나저나 생각해보니 강과산형님은 사진 찍어주시느라 정작
본인은 한장도 없었네요,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행이 라면을 먹을 땐 비가 안왔으나 하늘은 구름이 잔뜩,
마침 다 먹고 정리를 하니 장대비가 ~~~~ㅋ
운이 좋았네요.

휴게소에서 들머리로 이동중 차량안.
밖은 비가 거시키한데도 얼굴엔 웃음이 ,
어찌하시잖건지....ㅠ
잴 많이 웃으신분 뉴겨?............^^*

비가 와도 좋다고 합니다.
본인은 준비 끝났다공~~~~~ㅎㅎ
1기 대간을 어찌 다 뛰셨는지 짐작이 감미당....ㅋ

들머리인 지지개.
폭우 수준은 아니지만 꽤 굵은 장대비가 내렸다 좀 약해졌다를 반복합니다.
암튼 비는 원없이 맞았네요....ㅎ
카메라를 어찌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번엔
두고 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벌써 두번이나 버렸으니~~~~ㅠㅠ
아쉽지만,....
강과산형님과 시나브로님의 방수 카메라 덕을 보았네요.....ㅎ

산행을 시작하고 얼마 안되서 잠시 정리를....

개머리재 안내판.

오키짱누님은 좋습니다.
상황이야 어떻든 즐기는 자세....ㅋ
긍정적인 생각은 몸을 고생시킨다는 사실을
학실히 보여주고 계십니다....ㅋ
그것도
아주 마~~~니~~~~~ㅋㅋㅋ

상주쪽 대간 안내판은 이런것이 많습니다 방향은 정확한데
거리나 시간은 불분명해 참고 안하시는게 좋습니다.

첫 대간 나들이가 엄청난 우중산행이 되었으니 참으로 민망하게 되었습니다.
암튼 원없이 비를 맞으셨으니 혹 감기라도 걸리셨으면 어쩔꼬....ㅋ
다알리아님과 다움님 자매....^^*
같은 "다"이니 자매 맞는거죠?~~~

오늘도 함께 하시는
마른장작형님, 노찌님, 부르토님, 산들바람형님.
그나저나 마른장작형님 큰일 입니다.
다 젖을텐데
닉을 안마른장작이나 많이 젖은장작으로 바꿔야 할듯....ㅎㅎ

윗왕실 안내판이 원래는 똑바로 였는데 비가 하도 와서 뒤집어 졋다는 소문이....ㅋ

백학산을 앞두고 임도에서 다함께....
비가 엄청 오는데도 모두 즐거운 표정입니다.
사실 그래도 비가와서 시원하게 산행은 했습니다.

엄청난 비에 엄청 운무가 짖어 조망은 아예 꿈도 못 꿈니다.

무주상님.
항상 많이 챙겨주시는 행님임다만, 후배가 불량해서
마이 거시키함다.
형님 오늘도 즐거운 산행이 되시길 바라고
돌아가면 겹살에 쐬주 한잔....!!!!!

사진엔 자세히 안나오지만 3.6km를 0.6km로 글씨를 새로 써놓았네요.
이정표가 이런식입니다.....ㅋ
그래도 백학산 정상을 밟으려면 여기부터 땀깨나 흘려야됩니다.

멋쟁이 현술이형님.
시종일관 우산을 쓰시공 산행을,
무협지에 나오는 내공이 몇 갑자에 이르는 고수처럼
우산 한번 안 접고 산행을 마치셨네요....ㅋ

부르토님
제대로 우비도 안 입고 잘도 산행을 하시는데,
역시 대간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분입니다.^^

다움님.
비에 쪼매 카랑카랑 옥구슬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그래도 산행 내내 밝은 목소리로 분위기 업!!!!
두 갈래도 땋은 머리가 인상적이에요.
혹
소나기에 등장하는
그
소녀....? ^^*

오키짱누님은 기사형님이 주신 꽁짜^^
일회용 우비를 입고 좋아라 했는데,
나중에 보니 2002년 월드컵때 만들 홍보 우비였습니다.
많이 부러웠습니다.....ㅋㅋ
거기에 속성으로
봉숭아 물을 들인 손가락까정~~~~ㅎ
구람 겨울 오기전까지 거시키하면 앤이 생긴다는 거시키....?

오늘은 블랙으로 통일한(모잔빼구)^^
멋쟁이 노찌님.
오늘도 신나게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ㅎ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해가 뜨나
늘
행복한 분.
산들바람형님.
그게 뭐시냐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으니 행복한 거라는 뭐@~~~^^
존경스럽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시나브로님.
오늘은 방수카메라 덕을 많이 봤습니다.
요근래는 산행을 많이 못했다는데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ㅎ

저도 한장.
등산화는 이미 미꾸라지 무대이고
옷도 모두 젖은데다 안경은 서리가 껴서 뿌였고,
아주 그냥 거지꼴이 따로 없습니다....ㅋ

자유사랑님.
왠지 노란 우비에 표정은~~~
마치 가을여자?
분위기 있게 사진을 찍혔네....ㅎ

요즘들어 왕 장난꾸러기가 되 가시는
마른장형님.
표정만 봐도 딱 임다....ㅋ
그렇죠?

또 한명의 거시키....ㅎㅎ
이네아빠형님.
이런 말씀은 뭐 하지만
저 연세에 저러시면 병원차에 안 붙잡혀 가시남?..........ㅋ
(^_^)....~~

백학산 정상석.
후면엔 상주시 산악회에서 설치했다는 글이 있는데,
오랜시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오셨다 가셨으면
참
흙이 많이도 패였네요....

마지막 순서로 대간에 참석하신 마당바위형님.
말씀은 술을 적게 드시기 위해서 대간에 오셨다고 하시는데
전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
무주상형님하구 술 드신건 아닌지....ㅋㅋ

다알리아님
아름다운 대간을 보시고 돌아 가셔도 뭐 할텐데
하루 죙일 비를 맞쳤으니....ㅠㅠ
날이 거시키해서 지송한데
그래도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
시원한 대간길은 확실하니
그나마 다행임미다.....ㅋ

윗왕실재 안내판.

윗왕실재 생태통로 아래에서 점심을 드실 준비를 합니다.
자리는 좀 좁지만 그래도 비를 피할 수 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만,
엄청 떠드는 소리를 듣고도 걍~ 진행하신
후미팀은 미워할꼬야~~~~ㅠ
덕분에 점심도 제대로 못드시공~~~

옛고개라고 쓰여있지만 이곳이 개터재임다.

이젠 산행도 많이 진행되고
여유있는 상황임다.
편안하게 사진도 한장.
자유사랑님과 푸른소금님....^^

회룡재에서 함께....
듬직한 분들만 모아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한장이 꽉차게~~~~ㅋㅋㅋ
이제 산행도 얼마 안남고 다행이 회룡재 전에선 비도 그치고
룰루랄라 입니다.
처음 참석하신 링컨님의 내공도 대단하십니다....^^

잘못된 푯말,
"이 길은 1979년에 상판저수지가 만들어 지면서 공성면 들판으로 물길을 대기 위해
이 백두대간 아래로수로를 뚫었는데,
그때 새로 생긴 길이고, 여기서 북쪽 방향으로 300m에 위치하고 있는
서낭당고갯길 재가 실제 회룡재 입니다".
참고하세용.^^

역시나 시간과 거리는 무시하는게 좋습니당....ㅋ

경상북도 숲 생태원 안 문앞에 설치된 수도.
정말이지 오늘은 이곳이 오아시스입니다.
어찌나 깨끗하고 시원한지
회원님 모두 샤워를 노상에서 하셨네요....ㅋ
몇 번을 지나면서도 보기만 했는데~~

숲 생태원 전경.

카우보이형님.
오늘도 형님의 넉넉한 농담에 많은 분들이
즐거워 하시고
분위기를 잘 이끌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다함께 화이팅도 합니다.
원래 인증샷을 들머리에서 했지만 오늘은 우천에
날머리에서 함께~~~~ㅋㅋ
그나저나 젖은 옷을 모두 갈아입으니
영~~~~
딴 사람들 같습니당....ㅎ

처음 우리에서 대간에 합류하신 링컨형님.
좀 서먹하기도 하실텐데 이곳에
분위기가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자주 산행에서 뵙기를 기대합니다....ㅋㅋㅋ

새로운 후미대장님 이십니다..ㅋㅋ
설봉형님.
미안한데 그래도 형님이 잘
마무리 해주셔서 제겐 큰 힘이 됩니다.....^^*

요즘 부쩍 실력이 향상된?
푸른소금님.
얼마나 이쁜지 몰러요.......ㅋㅋ
소금님 끝나는 그 날까지 화이팅....!!

백두대간 숲 생태원 안내판.
바이 상주여~~~~

다음 들머리를 안내하는 대간 안내판.

돌아오는 길에 안산시화호에 설치된 철탑들....

마른장작형님과 오키짱누님이 무신 이야길 나누며 즐거워 하시는 걸까요?
알아맞춰 보세요....ㅋㅋ

좁은 의자이지만 그래도 잠깐 단잠에 빠진 설봉형님.
편히 주무세요....ㅎㅎ

마지막으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제 개인적인 생각은
백두대간이 되었든 일반원정 산행이 되었든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산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미를 잊지는 말아야겠지만,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들만 되시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오늘에 산행을 모두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비록
먼저 내려오고 늦게 내려오는,
시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스스로가 꿈꾸고, 바라는 목표대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면
좀 늦던 빠르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스스로 행복하다
생각하지 못한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
오늘도 행복한 날을 꿈꾸며....
감사합니다....^^*
게으름뱅이 사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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